장기 (將棋, Janggi) Leave a comment

가로 아홉 줄, 세로 열 줄의 반상(盤上) 위에서 초(楚)나라와 한(漢)나라의 정예 군대가 격돌하는 장기는 기원전 3세기 진나라 멸망 후 천하의 패권을 다툰 초한전쟁(楚漢戰爭) 을 모티브로 탄생한 추상 전략 보드게임입니다. 체스와 마찬가지로 고대 인도의 모의 전술 훈련 도구였던 ‘차투랑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전래되어 한나라 고조 유방과 초나라 패왕 항우의 치열한 건곤일척 승부를 담아낸 중국의 상기(象棋)로 재구성되었습니다.

한반도에 전래된 장기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우리 민족 고유의 독창적이고 역동적인 규칙을 품은 ‘한국 장기’ 로 진화했습니다. 중국의 상기가 판 한가운데 강(초하한계, 楚河漢界)을 두어 기물의 이동을 제한하고 수비적인 진형을 띠는 것과 달리, 한국 장기는 국경선(강)의 제약을 완전히 허물어 판 전체를 하나의 광활한 전장으로 활용합니다. 또한 대국을 시작하기 전 기병(마, 馬)과 코끼리 부대(상, 象)의 좌우 위치를 자유롭게 바꾸는 ‘상마 차림(마상마상, 상마마상 등)’ 배치를 허용하여 시작부터 수많은 포진과 심리전을 펼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기물들의 기동 방식 역시 한국 장기만의 깊은 묘미를 자랑합니다. 가장 강력한 화력 무기인 포(包) 는 반드시 다른 기물(포다리)을 징검다리 삼아 넘어야만 이동하고 공격할 수 있어 치밀한 길목 싸움을 유도합니다. 적진 깊숙이 파고드는 상(象) 은 가로 한 칸, 대각선 두 칸을 거침없이 전진하며 상대의 진영을 벼락같이 무너뜨립니다. 무엇보다 구궁(九宮)이라 불리는 왕의 궁성 안에는 대각선 활로가 그어져 있어, 궁성에 침투한 차(車)나 포, 졸(卒)이 대각선으로 번개처럼 기습 공격을 가하는 박진감 넘치는 난전이 펼쳐집니다.

천하를 두고 다투던 항우와 유방의 영웅호걸 역사를 32개의 목재 기물과 90개의 교차점 위에 압축해 놓은 장기는, 수백 년 동안 서민들의 사랑방과 마을 평상을 지켜온 민족 고유의 두뇌 스포츠이자 끝없는 수읽기의 향연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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