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사인 (V Sign) Leave a comment

카메라 렌즈 앞에서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검지와 중지를 펴 보이는 V 사인(V Sign)은, 백년전쟁 전장의 살벌한 도발과 제2차 세계 대전의 승리 선언, 1960년대 반전 평화 운동을 거치며 동아시아 특유의 친근한 사진 포즈로 자리 잡은 인류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의미 변천을 겪은 대표적인 신체 제스처입니다.

V 사인의 유래와 문화적 확산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결정적 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와 장궁병 전설 (1415년): 가장 널리 알려진 기원 설화는 1415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영국 장궁병들의 치명적인 활 공격에 시달리던 프랑스군은 “포로로 잡은 영국 궁수들의 활시위를 당기는 두 손가락(검지와 중지)을 모조리 잘라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에 영국 궁수들이 손가락이 온전히 붙어 있음을 과시하며 프랑스군을 향해 손등을 바깥으로 한 V자 손가락을 들어 올려 조롱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영국, 호주 등 영연방 국가에서 ‘손등이 상대방을 향하는 V 제스처’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일한 극심한 모욕과 욕설로 통용됩니다.
  • 윈스턴 처칠과 ‘V for Victory’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공습에 맞서 결사항전을 독려하던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벨기에의 정치가 빅토르 드 라블레예가 제안한 ‘Victory(승리)’의 첫 글자를 따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는 ‘V for Victory’ 제스처를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보였습니다. 이 손짓은 연합군의 불굴의 투지와 승리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 1960년대 히피 문화와 반전 평화의 상징 (Peace Sign):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히피(Hippie) 문화가 번지면서, 젊은 세대는 승리(Victory)의 손짓을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이루자”는 의미의 ‘피스 사인(Peace Sign)’으로 재해석하여 반전과 자유를 외치는 비폭력 저항의 상징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 동아시아 사진 촬영 문화로의 정착 (1970년대): 오늘날 한국과 일본 등에서 사진을 찍을 때 자연스럽게 취하는 포즈는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 당시 엉덩방아를 찧고도 활짝 웃으며 큰 인기를 끈 미국의 피겨 스타 재닛 린(Janet Lynn)이 카메라를 향해 V 사인을 그리던 모습과, 같은 해 일본 코니카 카메라 CF에서 배우 이구치 준이 V 사인을 하며 사진을 찍던 대중광고가 폭발적인 유행을 타면서 일상적인 친교와 밝은 표정의 대표 포즈로 정착했습니다.

중세 전장의 살벌한 손가락 절단 위협과 조롱에서 출발해 전쟁의 승리와 평화의 외침을 거친 V 제스처는, 전 세계인의 일상에서 어색함을 덜어내고 찰나의 기쁨과 유대를 기록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친근한 보디랭귀지의 아이콘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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