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시계 (Wristwatch) Leave a comment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신사의 품격을 대변하는 시계는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묵직한 회중시계(Pocket Watch) 였습니다. 당시 손목에 차는 시계는 귀족 여성들이 팔찌처럼 차던 깨지기 쉬운 보석 장신구에 불과했으며, 남성들 사이에서는 “손목에 시계를 차느니 차라리 치마를 입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나약하고 여성스러운 물건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이 고정관념을 단숨에 뒤엎고 손목시계를 남성의 필수품이자 대중의 도구로 바꾼 결정적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의 참호전이었습니다. 현대전으로 접어들며 수백 문의 대포가 일제히 포격을 가하고 보병이 동시에 돌격하는 정밀한 초 단위 작전 시간 동기화가 승패와 생존을 갈랐습니다. 진흙탕 참호 속에서 소총과 포탄을 쥐고 적과 대치하던 군인들에게, 품속 깊숙이 든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치명적인 지체였습니다.

장교와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회중시계 양쪽에 철사를 납땜하고 가죽 끈을 달아 손목에 묶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손목시계의 직계 조상인 ‘참호 시계(Trench Watch)’ 였습니다. 군용 시계에는 거친 전장을 견디기 위한 혁신 기술들이 잇따라 적용되었습니다. 포탄 파편에 유리가 깨지지 않도록 철망 가드를 덧대거나 깨지지 않는 플렉시글라스를 도입했고, 야간 기습 작전 중 어둠 속에서도 시간을 볼 수 있도록 방사성 라듐 도료를 바른 야광 바늘과 다이얼이 채택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수백만 명의 참전 용사들이 손목에 참호 시계를 찬 채 고향으로 복귀하면서 사회적 인식은 180도 뒤바뀌었습니다. 손목시계는 더 이상 여성용 장신구가 아니라, 전장을 누빈 용맹한 군인의 상징이자 극도의 실용성을 갖춘 현대적 남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품속에서 꺼내던 번거로운 회중시계의 시대를 끝내고, 전장의 포화 속에서 태어난 손목시계는 인류가 시간을 손목 위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통제하게 만든 위대한 도구 혁명이었습니다.

Leave a Reply